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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초기 기독교 교부들 "유스티누스 제1 변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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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3. 24.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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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에서 번역된 교부들의 글, 번역이 깔끔해서 좋다

유스티누스의 제1 변증서를 읽고 느낀 점
한국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왠지 모르게 도덕적 순결 주의를 향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도덕적인 결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개혁해야 할 부분이 존재하고, 잘라내야 할 부분도 존재한다. 이를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교회가 도덕적으로 순결해지면 교회는 사회의 지탄을 받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좋아해 줄 것인가? 정말 세상에서 들이대는 윤리적인 잣대를 만족시키면, 교회는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것인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런 환상을 가지면서 사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순수와 정결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교회 모델은 바로 초대교회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초대교회에 대한 알 수 없는 동경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초대 교회를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바울 서신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이 든다.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인 형태의 것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특히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면 역사상 교회가 가장 깨끗했던 시기는 언제일까? 개인적으로 기독교가 국교화되지 않은 2세기경이 가장 도덕적으로 정결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세기를 살았던 유스티누스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당대 기독교인들이 보인 도덕적 삶에 굉장히 자신만만함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패기를 보인다. “저희는 실제로 바람직한 질서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여러분의 가장 좋은 조력자들이며 협력자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당대 로마인들과 달리 역사에 종말점이 있고, 끝에는 심판이 있다는 종말사상을 철저하게 신뢰했다. 저자는 이런 종말론적 역사 인식이 그들이 당대의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탁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요즘같이 반지성주의로 비판을 받는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 근거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 “다른 이방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들을 지키기 위해서 경비를 서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인간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그는 철저하게 인간의 도움도 없이도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진리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자신들의 우상을 신처럼 섬긴다.” 저자는 이뿐 아니라 다양한 논지를 통해 기독교 신학이 왜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지 설득한다.

 

유스티누스의 글을 읽어보면 당대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도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많은 교회 개혁 세력들이 원하는 모습에 가장 부합한 그 삶을, 당대의 성도들이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모습 그대로를 삶으로 녹여내고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몹시 박했다. 그들은 무신론자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뭔가 모자라는 야만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심지어 무시를 당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괴롭히고 죽이기 위해 많은 거짓 선동과 모략이 판을 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가 항상 그들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유스티누스는 자신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로마의 권력자들 앞에서 글로 사투를 벌인 것이다. 그의 제1 변증서는 이렇게 아이러니한 환경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교회 개혁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도덕적 개혁을 추구하는 목소리 역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회에 썩은 부분이 있다면 도려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너무 잘못된 환상을 가진 채로 평생 이런 것에만 몰두한다면, 그는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사이 세상의 미디어에 이용당하는 꼭두각시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평생 이룰 수 없는 이데아에 집착하다 괴물처럼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어느새 자신에게서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리새인처럼 가면을 쓰고 사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 개혁을 그렇게 하고 싶은가? 세상의 뉴스 미디어에 칭찬받는 꿈과 같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소원인가? 만약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유스티누스 시대의 교인들이 탁월한 도덕성과 합리성을 보유하며 살았지만, 교회가 여전히 세상의 조롱거리였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예로 들며 당신이 꿈꾸는 그런 교회는 절대 세상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말할 것이다. 근거도 없는 자신만의 이데아를 당장 내려놓고 차라리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할 것이다. 타락한 세상이 절대자에 의해 참담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믿는 교회는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본질적으로 성가신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품 해설 요약
상황: 2세기 중반쯤에 이르러서 기독교에 대한 공격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변호도 유포되고 있었다. 유스티노스는 그리스 문학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권세자들에게 반박한다. 절대 자신들이 처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부당한 거짓 선동에 의해서 심판되는 일은 불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과정 가운데에서 그는 기독교의 위대함과 관련된 오해들을 적극적으로 해소한다.

 

아테네와 로마 문화권에서 활동했던 기독교 변증가들의 성향

아테네 문화권: 기독교의 종교적 주장에, 본질적인 주장에 더 관심을 보인다.

로마 문화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제시한다는 주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의 공민 자격을 주장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유스티누스의 변증 스타일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보는 듯 하다……가장 좋은 변호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다. 그는 그 시대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로마 정부로부터 끌어내기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수비적으로만 논증을 전개하지 않고 기독교 진리의 우월성까지 나아간다. 좀더 공격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글은 형식에 있어서는 분명 관용을 위한 호소이지만, 더더욱 명백히 개종을 위한 간청까지 이어진다. 그의 글에서 어떤 세련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들 중 하나이다.

그는 여러 오해들과 편견들을 제거하면서 어떻게 복음의 주장들과 그 시대의 요구들과 관심들 간에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룬다. 대부분의 다른 변증가들은 그들의 독자를 교회의 문 앞으로 이끈다. 하지만 그는 그 문을 열고 그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특히 제1 변증서의 많은 부분들은 단순한 일반 대중을 위한 변호라기 보다는 마치 탐구자들을 위한 입문서처럼 보인다. 한편 그의 작품은 16세기에 재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유스티노스는 그 자신의 세대 이후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유스티누스는 분명 철학에서 영적 만족을 찾았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진리를 모색하다가 플라톤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참된 지식의 기를 보여 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길에서 매우 멀리 가기 전에 그의 주의가 교회에 의해 설명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보다 심오한 지혜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가르침 안에서 그는 그가 찾아왔던 참된 철학을 인지하였다. 참된 철학을 찾은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에 대한 그의 언급들을 강조하기 위해 위경에 있거나 혹은 다른 전설들을 차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이 문서화 되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변증 스타일에 대한 평가
변증가는 항상 논증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인정할 위험이 있다. 때로 유스티노스는 그리스도가 단지 제우스의 아들들과 동일한 격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는 다른 곳에서 이런 인상을 바로 잡는다. 그가 남긴 변증서를 읽어보면 복음이 절대 인간 사상에 비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누구에게만큼 그에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은혜를 받고 있다.

문체와 개요

그는 연설, 대화, 혹은 서신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세부 사항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느라 자칫 잘못해, 그것이 그의 메시지를 설명하는 데 방해가 되도록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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