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시아 신학의 그리스도론,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세형 교수)

카테고리 없음

by noruboy 2020. 5. 1. 15:55

본문

아시아 신학의 그리스도론
발제자: 이세형 (협성 대학교)

 

출처: 카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71)

 


안병무의 그리스도론
신의주에서 태어난 안병무(1922-1996)는 간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후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병무는 군부의 지배와 한국 민주화의 태동기를 거치면서 고난 받는 민중의 삶을 신학적 주제로 삼아 『역사와 해석』, 『갈릴래아의 예수』, 『갈릴래아의 예수』 등을 저술하였고 1973년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민중 해석과 신학적 작업을 통해 민중신학을 발전시켰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병무에 따르면, 바울서신의 목적은 이방선교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론 구원론에 집중하면서 변증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보다는 케리그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바울처럼 변증적이며 관념적으로 추상화한 그리스도론이나 구원론을 전개하지 않고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민담적 서술법을 쓰면서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갖는다. 결국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복음서, 특별히 마가복음에 근거를 갖고 있다. 안병무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을 축약한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예수는 민중이다. 2) 민중은 예수이다.

두 번째 명제에서 민중은 단독적으로 메시아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안병무의 그리스도론은 민중으로서의 예수, 집단적 존재로서의 예수, 메시아로서의 민중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민중으로서의 예수: 예수는 민중이다.
몰트만은 양식사 비평이 예수의 청중들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들의 사회적 특성에 대하여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비역사화되었고 청중들로부터 소외되었고, 예수의 말씀은 청중들로 독립적인 것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병무는 예수의 청중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특성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안병무는 마가복음에 근거하여 예수의 청중들을 ‘오클로스’라고 규정한다.

오클로스는 예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여드는 사람들이다. 이 오클로스는 라오스와 구분된다. 라오스는 국가와 종교적 체제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클로스는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클로스는 정치적 힘을 지닌 그룹이 아니라 단지 무리들이다. 이들은 소외되었고, 박탈당하였으며 힘이 없는 민중이다.

안병무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부정하면서 예수는 출생부터 민중적임을 주장한다. 마가복음에 근거해 보면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를 다윗의 족보에 맞추려고 하지만 예수는 다윗의 자손에 적합하지 않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표현하는 곳이 두 번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나 제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불려진 표현이다.

또 예수는 당시 귀족의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알았는지 의심스럽고, 지식층들이 평소에 사용하였던 헬라어를 사용한 흔적도 없다고 안병무는 지적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도시로 간 기록이 없으며, 직업 또한 목수였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노동자였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안병무는 예수의 공생애의 출발점을 종교적인 사건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갈릴리는 정치, 문화, 경제의 차원에서 억압, 소외, 착취된 주변지를 상징한다. 따라서 예수가 갈릴리로 간 것은 민중으로서, 민중을 위하여, 민중의 땅으로 간 것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예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집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이리저리 방랑하는 빈털터리였다. 예수는 상류층이 사는 곳에 접근하지 않았고, 인간관계는 극히 저급한 계층에 한정되었으며, 언어는 농경사화의 언어로 민중의 언어였다.

집단적 존재로서의 예수: 예수는 집단적 존재다.
안병무는 다니엘서의 인자를 집단적 개념으로 해석하고, 마가복음을 예수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민중의 사회 전기로 읽어가면서 예수를 집단적 존재로 제시한다. 안병무는 김용복의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개념에 토대를 두고 마가복음을 민중의 사회 전기로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서는 처음부터 ‘홀로’의 예수를 소개하지 않고 ‘더불어’의 예수를 서술한다. 즉 “마가에 서술된 예수, 그의 형태, 그의 운명은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고 한 ‘사회적 전기’이다.”

그는 서구 신학자들이 예수를 개인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는 주체가 되고, 민중은 객체로 전락한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서구 신학자들처럼 예수를 개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서구의 관점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론이 되어 버린다. 안병무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안병무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치유사건을 예수 홀로 일으킨 단 독자의 사건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일으킨 ‘우리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치유사건의 주도권은 예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병자들에게 있다. 왜냐하면 치유 사건의 출발점은 예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쪽에 있으며, 예수는 병자들의 요구를 따르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에서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즉 민중의 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는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없었다. 결국 안병무에게 있어서 치유 사건은 예수에 의한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수와 민중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더불어의 사건’, ‘집단적인 사건’이다. 안병무는 또한 십자가 처형에서도 예수의 집단성을 읽어간다.

“그의 당하는 곤욕과 고독한 처형은 바로 그때 민중의 운명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 나사렛 예수가 버림받고 부당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그렇게 당한 이 수난의 예수는 집단의 표상이다.”[1]

안병무에 따르면, 만약에 예수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이었다면, 즉 2000년 전 유다의 한 청년의 운명에 불과하다면 예수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수난은 개인의 수난이 아니고 민중의 수난이고 인류 전체가 당하는 수난이라고 결론짓는다. [2]

 

메시아로서의 민중: 민중이 메시아이다.
안병무의 그리스도론에서 민중은 메시아의 위치에 있다. 메시아로서의 민중의 모습은 제자들과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제자들을 맹렬히 비판했지만 오클로스는 책망받는 예가 없다. 또한 예수는 오클로스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종교적 평가를 내리지 않고 무조건 영접하는데 이는 민중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3].더 나아가서 예수는 민중을 민중 운동을 위한 그룹으로 조직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예수는 저들을 규합하거나 또 어떤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능동적으로 저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오직 저들의 요청에 응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수동 내지 그들과의 일치의 입장에 섰지, 저들의 지배자, 랍비 또는 수령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안병무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메시아 의식을 가지지 않았고, 이미 형성된 메시아라는 표상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만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리스도이다.” 안병무에 따르면, 참다운 메시아 상은 얻어맞고 죽임을 당하여 죄와 악마마저도 소멸함으로써 악의 악순환을 단절하겠다는 왕자적 메시아다. 즉 권력을 가진 강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민중적 메시아다. 악의 구조와 악순환을 칼로써 끊으면 복수의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고통으로 복수의 악순환을 끊은 참다운 메시아다.

그렇다면 민중은 어떻게 한을 단하고 메시아의 역할을 하는가? 안병무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수난을 당하다 보면 결국은 권력이 무력화되어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4]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고통이 혼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당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통을 나눠가질 때 해방을 위한 힘을 얻게 되지요.····· 민중해방은 민중 스스로 하는 것이고, 그 전략도 스스로 발견을 해요. 내 가난의 슬픔을 우리의 가난의 슬픔으로 바꿔 놓으면 자연히 구원 운동으로 해방으로 나가게 됩니다. [5]

 


[1] 안병무,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민중과 한국 신학』183.

[2]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303-305.

[3] 안병무, 『갈릴래아 예수』, 141.

[4]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00.

[5]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26.

댓글 영역